[가이무/바나포도] 변함없이
SHT2014. 8. 30. 05:30
밋치 오른쪽 합작 바나포도
비가 온다. 미츠자네는 타카토라가 썼던 집무실의 넓은 창가에 서있었다. 본래의 주인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신이 자리 잡은 지금, 집무실의 안에 타카토라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타카토라가 쓰던 물건들을 치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 하나도 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단지 이 곳에 타카토라가 서있지 않다는 그 이유만으로 집무실 안의 풍경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눈을 감았다. 빗줄기가 타닥타닥, 바닥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두꺼운 유리창 밖에서 들린다. 그리고 고막을 가볍게 울리는 그 소리 뒤로는 여전히 느릿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착실하고 은밀하게 그가 이끌고온 헬헤임의 식물들이 스륵스륵 움트는 소리도 들린다. 언제 들어도 위화감이 넘치는 소리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에 처할 거라고는 꿈에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랬는데 지금은 이 공간이 미츠자네가 서있을 곳이었다. 가이무 팀원들이 북적거리던 개리지가 아닌 이 아무도 없는 적막 속이. 정말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구나. 자조하며 웃었다. 가끔씩 질식할 것처럼 목구멍 언저리를 울렁거리게 만드는 이 위화감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세상에, '위화감'이 익숙해진다니 이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이 또 있을까. 유리창 바깥을 바라보던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마를 기대었다. 다시 울컥하고 애써 외면해왔던 더부룩한 감정들이 덩어리가 되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이마에 닿은 유리창의 서늘함에 그나마 정신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차마 풀어내지는 못할 넥타이의 매듭 부분만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떴다. 빗줄기가 정신없이 쏟아져내리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와중에 바깥에서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슬쩍 눈가를 찌푸리며 초점을 맞추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물에 푹 젖어 색이 가라앉은 바론의 코트가 제대로 보였다. 저 사람은.
"……쿠몬 카이토."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왜 갑자기 그리도 맘이 급해졌는지 모르겠다. 미츠자네는 기대서있던 유리창에서 벗어나 저도 모르게 밖을 향해 뛰었다. 발에 채이는 덩쿨들을 피하며 폭포같은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산을 챙길만한 여유도, 이제와 비를 피하겠다는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빗방울이 들어와 따가운 눈을 깜박거리며 느릿한 걸음으로 앞을 향해 걷고 있는 카이토의 등을 쫓아갔다. 천천히 철벅철벅 걷는 걸음 뒤에서 찰박찰박, 찰박거리는 가벼운 뜀박질이 따라붙었다. 그 소리가 귀에 닿았을 때서야 카이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쫄딱 젖어버린 미츠자네의 모습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떴던 눈을 살짝 찌푸렸다. 왜 저 녀석이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지 의미불명이다. 말없이 숨만 몰아 내쉬며 자신을 바라보는 미츠자네와 시선을 맞추고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몇 초간 이어가던 카이토는 그제서야 툭 말을 던졌다.
"뭐냐."
아아, 그래. 이 목소리. 미츠자네는 그제서야 자신이 왜 그리도 필사적으로 쿠몬 카이토의 뒤를 쫓아왔는지, 그를 마주하고 그 눈빛을 마주하고나서야 깨달았다. 여전하다.
정말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미츠자네를 바라보는 마이의 눈빛, 팀원들의 눈빛, 코우타의 목소리, 호칭. 모두를 지키고자 원했던 센고쿠 드라이버를 스스로의 손으로 놓아버리고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게네시스 드라이버를 쥐고 있는 나 자신도. 타카토라가 자리했던 공간에 남은 것은 이제 공허 뿐,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 것도 이제 꽤 오래된 일이다. 유그드라실에서 자와메 시 전체를 내려다보게 된 것은? 이 것 역시도 낯설다. 분명히 나는 저 아래, 스테이지에서 모두와 웃고 있었을 텐데. 그 때가 벌써 까마득해. 정말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유일하게, 끈질기게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 당신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
"쿠몬 카이토.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해?"
"…하?"
찡그린 미간 사이가 좀 더 좁혀지는 것이 보인다. 이 표정이다. 쿠몬 카이토만은 여전히 옛날과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 자리에 오롯이 서있는 나를 향해 경멸어린 눈을 하고 있는 그 표정. 그 위화감 없는 표정을 마주하자 옛날의 감각들이 떠오르며 맘이 놓이는 것이었다.
"뜬금없이 나타나서 무슨 영문모를 소릴 하는거냐."
"그냥."
그러니까 어서 말해줘.
카이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맞은 편에 선 빗 속의 미츠자네는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 몸에 달라붙은 검은 정장.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어린애. 카이토는 입을 열었다.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예나 지금이나 재수없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울면서 걷고 있는 아슬아슬한 어린애의 모습이, 나와 닮은 주제에 끔찍하게 딴 판인 그 얼굴이 가장, 꼴보기 싫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