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무/메론오렌] 그 날 여름
SHT2014. 5. 21. 01:34
3가지 연성 키워드 진단메이커 돌려서 나온 주제로.
【 메론오렌 】
단어 : 편지
문장 : 그 미련한 인간이 나였다.
분위기 : 한여름, 엄청난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져 시원해지는 것처럼
스토리날조 쩝니다.
푹푹 찌는 날이었다. 맴맴 우는 매미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리던 그런 날이었다. 꽤나 살 아리게 추웠던 꽃샘추위가 머나먼 날처럼 여겨져 지금은 어렴풋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쿠레시마 타카토라는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부서져 하얗게 물든 길 위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모든 것이 어색했다. 늘 입던 정장을 뒤로 하고 몇 년만에 입어본 것 같은 사복도, 많은 종류의 차들이 얽혀 빵빵 거리던 복잡한 차도 대신 사람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도. 그리고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일도. 왼손에 들린 편지봉투를 한 번 내려다 보았다. 반듯하게 길다란 네모 모양의 흰 편지봉투가 그럴 리 없을텐데도 무겁게 느껴졌다.
"..."
턱 아래로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가볍게 훔쳐낸 뒤 타카토라는 다시 정면을 향해 걸었다.
정신을 차린 뒤로 가장 먼저 머릿 속에 떠올랐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니고 다름 아닌 너였다. 밖은 이미 여름이 찾아와 있었다. 무턱대고 너를 찾아 거리를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발견했지만 친구인 듯한 여자 아이와 웃으며 멀어지는 너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돌아섰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 너를 찾기만 했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얻은 오피스텔의 안에서 나는 밤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오로지 스탠드 등에 의지한 채 내가 하던 것은 흰 종이에 너에 대한 마음을 무턱대고 써내려가는 것이었다. 한 때 너는 내게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계속 그랬을 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내가 너를 알지 못하고, 너 역시도 나를 몰랐을. 그런데도 너와 내가 서로를 알게된 것은, 어쩌면 무척이나 희박한 확률의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널 알지 못했던 때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너는 내게── 천천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멈춘 채로 더 써내려가지 못하고 그저 가져다대기만 하고 있는 만년필에서부터 흘러나온 검은 잉크가 흰 종이에 번져 작은 점을 만들고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쓰고 있던 것은 소위 말하는 연애 편지라는 것이었다. 몇 년 전까지의 자신이었다면 정말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보았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동경해오던 선배에게 오늘이야말로 고백을 하겠다던 같은 반 여학생이 있었다. 밤새 써온 연애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둔 채 가슴을 졸이며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던 모습. 그 날 방과 후 귀가하던 나는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오래도록 손에 쥐고 있어 약하게 구겨진 연애편지를 품에 안고 상대를 기다리던 그 애를. 그 때의 나는 그 여학생을 미련하다고만 생각했다. 타인에게 눈이 팔려 자기 자신을 갈고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 철없음을 참으로 한심하다 여겼다. 그랬는데.
그 미련한 인간이 나였다. 지금 이 꼴을 보라. 과거의 내가 비웃고 한심하다 여겼던 그 가슴앓이를 나는 이제서야 겪고 있었다. 어느 덧 검은 잉크는 바로 눈에 띌 정도로 번져있었다. 펜을 내려놓고, 이 혼란스러움을 잊기 위해 스탠드 등을 끈 뒤에 의자에 깊히 몸을 묻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부터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뒤흔들었다. 커튼이 서로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자, 책상 건너 편에서 교복을 입은 어렸던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찌르르 울리는 매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날은 밝아있었다. 여전하다. 잠에서 깨어나도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너 뿐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어제 쓰다만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나는 마침내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너를 떠올리면 가슴에서 뭉글거리던 것이 벅차오르는 행복함을 느낀다. 그 행복함이 몸 곳곳에 퍼져 따뜻해진다. 그러다가도, 너의 거절을 상상하면 손 끝에서부터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나를 아는 이들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비웃겠지. 너는 나를 그런 유치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네가 내 희망이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너의 집 앞에 서있다.
*
평소보다 늦은 아침이었다. 거실로 나와보니 집 안은 조용하다. 누나는 아침 일찍 출근한 것 같고. 집 안을 슬슬 어슬렁거리다 테이블 한켠에 놓여있는 식빵 두 어개를 꺼내 구우며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버석거리는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며 아직 잠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으로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은 TV의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소식이 끊긴 지도 이제 벌써 몇 주더라. 타카토라라는 네 글자의 이름만을 남겨두고 그 남자는 온데간데 없이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한 번은 꿈을 꿨나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꿈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아직까지도 내 안에 생생하게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 의심도 없이 내 말을 믿어주었던 당신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고마움은 곧 신뢰가 되어 내 안에 자리잡았다. 얼마안가 그 신뢰도 흔들릴 뻔 했지만, 여전히 나는 당신을 믿고 있다. 나를 공격했던 그 모습은 어쩌면 당신이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맥락없고 바보같은 믿음이 계속. 그래서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그저 당신의 말을 듣고 싶었다. 바보같은 믿음은 걱정이 되고, 그 걱정은 곧 그리움이 되었다. 어느샌가 틈만 나면 당신에 대한 것이 깊숙한 어느 곳에서 불쑥 비집고 올라오고는 했다. ...같은 생각을, 벌써 몇 번째 하는 걸까.
"...으음."
슬슬 정신이 들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도 쉬는 날이고.. 누나 대신 장이나 봐둘까. 잔에 반쯤 남은 우유를 비우고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냥 틀어놨던 TV에서 기상 캐스터의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속 되던 무더위가 오늘 오후부터 조금 사그러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더운데? 며칠 전 누나가 베란다에 매달아 놓은 풍령을 한번 바라보았다. 꿈쩍도 안하고 굳어선 멈춰있다. 리모컨을 찾아 TV 전원을 끄고나서 집을 나섰다.
장보기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간 싸움이다 뭐다 바빠선 제대로 신경을 못 써준 것이 줄곧 미안했었기 때문에 이번엔 누나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골라 담아왔다. 계산을 하고, 빵빵하게 틀어놓은 에어컨 탓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시원한 마트에서 나오자, 찌르는 듯한 눈부신 햇빛에 잠시 눈가를 찡그렸다. 이어서 바깥의 텁텁한 공기가 맨 피부에 늘러붙는 것 같아 찝찝해졌다. 아, 싫다. 얼른 차가운 물로 샤워나 하고싶어.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며 붉은 신호가 들어온 횡단 보도에 섰다. 눈 앞을 빠르게 왔다갔다하는 여러 대의 차들로부터 뿜어져나오는 매연들이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하릴없이 신호를 기다리는 나는 그만 흡 숨을 들이켰다.
"타카토라..?"
아지랑이 너머로 당신이 보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하게 당신이다. 이 횡단보도 건너편에 분명. 마음이 급해져선 신호와 당신을 여러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놓치기 전에 어서 잡아야하는데, 빨리, 빨리. 이런 나를 일부러 놀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아직도 선명한 붉은빛만 들어와있는 신호등이 야속하기만 했다. 발을 동동 구르다, 푸른빛에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나섰다. 타카토라, 타카토라, 타카토라.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당신을 향해 뛰듯이 걷던 나의 걸음은 중간즈음에 다다랐을때 천천히 멈춰서버렸다.
"..."
나는 그저 착각을 했던 것 뿐이었다. 내가 그라고 착각했던 사람은 그저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와 나잇대가 비슷한 다른 사람이었다. 고작 옷차림 하나만으로 그라는 생각에 온 정신이 빼앗겼던 방금 전의 내가 한심해졌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당신이 그리웠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찾아온건지 알 수 없는, 터무니없이 대책없는 그런 그리움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될지도. 온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저마다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몇몇은 함께 걸으며 웃고 떠들고, 어떤 이는 무언가 중요해보이는 전화 통화를 하고, 또 어떤 이는 평온한 얼굴로 길을 걷는 등. 별 탈 없는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 사이에 나는 홀로 서,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해도 나 역시 저들 사이에 있었을텐데, 지금은 옛날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들을 했었는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내 일상은 당신이 가져가 버렸다. 그 것이 설렘 이전에 무서워서 울고 싶어 졌다.
빠아앙! 날카롭게 귀에 꽂혀드는 클렉션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나는 아직도 횡단보도 위였지. 작게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고, 운전자들을 향해 죄송하단 인사를 하며 빠르게 건넜다.
터덜터덜. 힘이 빠진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머리도 무겁고, 마음도 무겁고. 땀에 젖은 이 옷도 무겁고, 손에 들린 짐들도 무겁고. 날씨마저 열기와 습기를 잔뜩 머금어 무겁기만 하다. 햇빛을 피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자 조금 서늘해졌다. 아파트의 가정 수 만큼 다닥다닥 붙어있는 우편함들을 바라보다가 버릇처럼 우리집 호수가 적힌 함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어."
별 기대없이 들여다본 우편함 안에는 흰 편지봉투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무거운 짐들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편지봉투를 꺼내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상한 편지였다. 하얀 편지 봉투엔 '카즈라바 코우타'라는 내 이름 글자만 검은색으로 단정하게 쓰여져 있었다. 보낸 이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내용물을 꺼내 읽었다.
「……
그런데 지금은 널 알지 못했던 때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너는 내게 그리움이고, 안타까움이고, 조금은 괴로운 행복이다.
너는 내게 사랑이었다. 사랑 그 자체였다.」
맴, 매앰. 쓰르람. 어느 방향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울리는 매미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음에도 나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나는 한 손에 그 편지를 꼭 쥔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갈 뿐이었다.
뛰고, 뛰고, 또 뛰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골목길을 달리다 멈췄다. 스무 걸음 정도 앞선 곳에서 검은 티셔츠를 입은 그가 서있었다.
망설임을 무릅쓰고 코우타가 사는 집의 우편함에 밤새 쓴 편지를 넣어두고 나온 타카토라는 그 곳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근처를 빙빙 돌았다. 이제 슬슬 주변 풍경이 눈에 익을 즈음,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코우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면.
매미 울음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우웅 하고 하늘이 작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날아오고 있었는지 모를 커다랗게 새하얀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었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 고요한 공간 속에 너와 내가 서있었다.
코우타의 귀에선 들릴 리가 없을 터인 집에 매달아놓은 풍령이 작게 흔들리며 내는 땡그랑땡그랑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솨아아. 바람이 불었다. 강하게 스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잔뜩 흐트리고 옷자락들을 부대끼고는 피부에 찐득하게 늘러 붙어있던 땀들을 씻어 날렸다. 타카토라의 오른편에 굳게 선 벽들 군데군데에 어린 아이들이 달아놓은 바람개비들이 일제히 핑글핑글, 그와 함께 시원한 풀내음이 코 끝에서 돌았다. 그 앞에 코우타가 다가온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여름향과 함께 너는 나에게 그런 바람처럼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