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자드/하루코요] 희망이 부르는 밤
SHT2018. 2. 15. 01:37<밀레니엄 특촬 이성커플링 합작 'HER♡MANCE' Vol.5>에 가면라이더 위자드 하루코요로 참여했습니다. :D
→http://heromance214.tistory.com/18
* 가면라이더 위자드 완결 및 가이무&위자드 무비대전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우마 하루토 x 코요미
Written by. srkg
“……루토, 하루토!”
누군가가 익숙한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익숙할 법한 것이,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은 바로 지금 잠에 반쯤 취해 비몽사몽한 자신의 것이다. 계속 듣다보니 제 이름을 부르는 이 목소리도 어딘지 낯익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맣고,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 지난 몇 년간 항상 그의 곁에서 그를 북돋아 주었던 목소리다. 하지만 이 목소리를 들어본 지도 벌써 몇 개월. 소녀를 만난 이후 이 정도로 긴 시간동안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루토. 그만 일어나.”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소녀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받아들여 잠들기를 택했다. 그랬다. 가장 신뢰하던 그의 품에서, 코요미는 고요한 잠에 빠졌다. 이것은 코요미의 목소리다.
“……어?”
몽롱한 정신을 계속해서 흔드는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하루토는 퍼뜩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시야에 집중하자 곧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자그마한 얼굴과 매끄럽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 동그란 눈이 그제야 안도한 빛으로 미소를 그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겨우 눈 떴네.”
그리운 목소리. 제 처지를 비관하듯이 생명이 깃들지 않은 인형처럼 굴었던 코요미는, 하루토나 그가 데려온 동료들의 온기를 받아들인 이후로 종종 이렇게 웃었었다. 그렇게 그리운 감성에 젖어들기 시작했을 때에 하루토의 이성이 날렵하게 고개를 들이민다.
코요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눈앞에 실체하는 코요미는, 또 누군가의 장난질에 끌려나온 것일까? 하지만 현자의 돌은 내가. 내 안에.
“걱정하지 마, 하루토. 나는 하루토의 언더월드에서 정말 편안히 쉬고 있어.”
벌떡 상체를 일으킨 하루토의 어깨를 가만히 짚은 코요미는 하루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한다. 코요미는 따뜻하지 않은 제 피부가 누군가에게 닿는 것을 기피했다. 자신을 받아들여준 하루토에게도, 이런 식의 접촉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정말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하루토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하루토는 단 한 번도 제 몸에 닿는 코요미의 손이 차갑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가 기억하는 한 코요미의 손은 언제나, 언제나 따사로웠다.
“그럼, 이건… 내가 또 다시 내 언더월드 속으로 들어온 거야?”
“음…… 들어왔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해. 내가 하루토를 불러낸 거니까.”
“코요미가…?”
하루토는 어느새 긴장이 풀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얼떨떨하게 대답을 되돌리는 하루토를 향해 코요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은 하루토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거든.”
코요미의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좀 더 설명을 듣고자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하루토의 입을 막은 코요미는, 그 대신 하루토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루토는 그제 서야 자신이 깨어난 주변 환경을 둘러볼 정신이 들었다. 이곳은 면영당에 있는 하루토 자신의 방이다. 아직도 여행을 떠난 채인 하루토가 지금 면영당 내 제 방에 와있을 리는 없다. 어쩐지 꿈을 꾸는 듯해 하루토는 잠자코 코요미가 이끄는 대로 따라나섰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으니, 어쩌면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방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자 익숙한 면영당의 내부가 보였다.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도 없이 조용하다는 것뿐이다. 하루토는 모두는 어디 갔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면영당 밖으로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시끄럽던 거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 코요미는 외출을 위해 둥그렇게 내려앉은 어깨에 케이프를 여몄다.
“하루토.”
“응?”
“같이 외출한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음, 그러니까… 슌페이가 말했던 것처럼. 그, 데이트 말이야.”
말끝을 약간 어물거리던 코요미는 결국 데이트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하루토의 소매 끝자락을 조심히 잡았다. 창백하기만 했던 뺨에 혈색이 돌며 붉게 달아오르는 변화는 바라보면서, 하루토는 그만 웃어버리고 만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 주변은 왜 이렇게 조용한지 아무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되긴 했네. 그럼, 가실까요.”
하루토는 마치 에스코트를 하는 것처럼 제 오른팔을 약간 들었다. 하얀 뺨을 물들인 채 코요미가 웃었다. 응. 언제나 호수처럼 잔잔한 목소리가 기쁨을 담고 대답했다. 들어 올린 팔에 작은 손이 감겼다.
코요미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하루토는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코요미는 항상 면영당에 틀어박히기 일쑤였고, 하루토는 그런 코요미를 데리고 외출을 하던 일이 가끔식 있었지. 그렇게 외출을 하게 되면 코요미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씩 물어 안겨주기도 했었다. 모자라던가, 장갑이라던가.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제법 데이트다운 데이트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코요미는 쇼윈도 마네킹에 걸린 옷을 유심히 보거나, 진열된 장신구들을 살피다가 한 두 개 정도 하루토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거 하루토랑 어울릴 것 같아. 어색해하는 것이 빤히 보이는 말투와 함께 말이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했지만 결국 그들이 산 물건은 같은 디자인의 한 쌍의 팔찌가 전부였다. 코요미는 이것저것 필요하다는 말을 하며 하루토를 끌고 다녔지만, 사실 무언가를 사러 나왔다기보다는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 마을은 구경거리가 은근히 많았으므로, 광장에 놓인 조형물 사이를 걸어 다니고, 군것질거리는 자연스럽게 패스하고, 분수대를 잠시 구경하기도 했다. 시간이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돌아다닌 뒤에야 하루토는 코요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코요미. 힘들지 않아? 슬슬 돌아갈까.”
“응……. 돌아가야지. 있지, 하루토. 그 전에 우리 한 곳만 더 산책하자.”
“흐음. 괜찮겠어?”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대답하는 코요미의 목소리가 유난히 가냘팠다.
어딘가 들뜬 것처럼도 보였던 코요미의 걸음걸이는 어느새 하루토가 기억하는 것처럼 느릿한 속도로 돌아와 있었다. 코요미의 속도를 맞추며 걷던 하루토는 문득 귀를 때리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 바다 냄새가 났다. 거리를 걷던 그들은 하루토가 눈치 채지 못한 새에 모래사장 위에 있었다. 하얀 모래사장 위에 쓸쓸히 매달린 하얀 그네. 그 뒤로 그림처럼 우뚝 선 저택. 하루토는 이 장소를 알고 있다.
“…….”
하루토는 이 장소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다. 굳어버린 하루토의 표정을 살핀 코요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이제 코요미에게 장갑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에 부드러운 손이 닿은 순간 서로의 손가락이 얽혔다. 이 장소에 돌아와보니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코요미.”
“……응.”
“오늘만은 나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고 했지.”
“기억났어?”
“잊을 리가 없지.”
오늘은 사바트가 벌어졌던 날. 하루토가 과거에 겪었던 절망. 그 절망을 되새기는 과거가 돌아오는 날이다. 이 날만은 하루토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코요미의 작은 속삭임이 들린다. 코요미의 염려대로 하루토는 이 날 하루 동안, 어쩌면 괴로운 과거가 떠오르는 기억에 잠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 일거라고 하루토는 확신할 수 있다. 이 날은 절망이 돌아오는 날이기도 했지만, 하루토가 다시금 희망을 품은 날이기도 했다. 꿋꿋이 살아남은 희망의 마법사.
하루토는 몸을 돌려 옆에 선 코요미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하루토? 작은 부름에 하루토는 코요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득 보듬었다. 내 희망은 언제나 따뜻했어.
“내게는 코요미가 주고 간 희망이 가득해.”
“하루토…….”
“그러니까 약속할게. 나는 절망에지지 않아.”
이렇게 자신을 염려하는 코요미가 항상 함께 있다. 아마도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온갖 절망을 뛰어넘은 것 같다. 하루토의 든든한 대답에 코요미는 품속에서 느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응. 하루토의 허리로 따뜻한 손이 감겼다.
끝나가는 시간의 끝자락에서 하루토는 마지막으로 코요미의 얼굴을 시야에 가득 담았다. 무거운 종소리가 울린다. 그 순간, 코요미를 품에 가득 안고 있던 그 감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괘종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하루토는 멀리서 들린 종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의 로비에 거대한 괘종시계가 걸려있던 것이 기억났다. 아직은 모두가 잠들어있는 캄캄한 한밤 중. 방마다 배치되어 있는 전자 시계를 확인하자 막 자정이 지난 참이다. 코요미가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고 했던 그 하루는 벌써 훅 지나가버린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