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눈을 떴을 때, 네가 눈 앞에 있었다. 어느 틈에 내가 잠이 들어버린 걸까 싶어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보니 최근 잠에 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팽팽 굴려보다가, 머리카락과 뺨에 가볍게 닿아 스치고 지나가는 찝찔한 바닷바람 냄새와 철썩이는 얕은 파도 소리에 결국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 되어 생각하길 포기하고 나를 보고 있는 눈 앞의 당신을 불렀다. “타카토라.” “그래.” 내 부름에 곧장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이렇게 평화로웠나 싶어 낯설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리운 목소리였다. 당신이 사라지기 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처음 듣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더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들었던 당신의 목소리라고는 감정을 배제한 낮은 목소리와 그리고 죄책감에 짓눌린 마지막 순간의 그 무거웠던 목소리 뿐이었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여긴 뭐고, 또 당신이 왜…” “그게 중요한 건가?” 당연히 중요하지! 자동으로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던 말을 꾹 참았다. 그 말대로였다. 내가 왜 이 곳에 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 있는데,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 당신이 있는데.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는 사이 타카토라는 잠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손에 든 채로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엑.” 작은 흰 상자였다. 겉면에 금박으로 살몽네 아저씨가 한다던 그 카페의 간판에 똑같은 글씨가 그려진. 그러니까 케이크 상자라는거다. “뭔가, 그 얼빠진 얼굴은.” 내가 지금 얼이 안 빠지게 생겼어. 지금 당신이랑 제일 안 어울리는 걸 들고 불쑥 나타났는데. 라고는 또 다시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니… 음, 갑자기 웬 케이크…?” “...” 타카토라는 잠시 말을 아끼듯 입술을 굳게 닫고 들고 있던 흰 상자를 당신과 내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젖히자 흰 생크림 위에 탐스럽게도 빨간 딸기 하나가 얹어져 있는 한 조각의 쇼트 케이크가 나왔다. 정말 누나가 딱 좋아할만한 디저트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미나토에게 들었었다. 단 걸 섭취하면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다고.” “...그래서?” “지금 네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당신은, 몇 초간 내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마지막에 봤던 당신이 밋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한 순간도 긴장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두서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타카토라가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듣기로 했다. “그 것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단 한번도. 내가 긴장을 놓는 순간 세계가 순식간에 잠식되어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나는 단지 무서웠던 거지. 바로 곁에 내가 지키고 보듬었어야할 미츠자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내몰려 있었던 거겠지.” “타카토라…”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미츠자네에 대한 것까지 몽땅 너에게 떠넘겨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카즈라바, 너만은.” 뺨에 닿을 것 같았던 손은 긴 검지 손가락만 살며시 닿았다가, 스치듯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가 따뜻해서, 바로 지금까지도 당신을 망자라 여기고 있었던 내 자신이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따뜻할 리가 없는데. 너는 타카토라가 아니잖아. 그저 지금 내가 발을 들여놓은 이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내가 타카토라의 모습을 빌려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그렇게 여겼는데. “타카토라.” 네 이름을 불렀다. “그래.” 너는 변함없이 대답했다.
“지금의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어? 칭찬해주고 싶다던가.” “이미 예상하고 있을텐데. 마냥 칭찬할 수는 없다.” “하하.. 그렇겠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희망의 길을 걷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향해 당신이 웃은 것 같았다. 타카토라, 당신을 바라보는 나는 지금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보기 민망하게 울고 있지는 않을까. 바보같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가볍게 깨문 입술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타카토라의 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손을 따라가면 긴 손가락이 집어 든 빨간 딸기가 보인다. “그러니 지금은 길목에 잠시 앉아 쉴 때다.” 그 말에 나는 맥없이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 정말 타카토라 안 같아. 그리고 입술을 열어, 닿은 딸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딸기에 묻어나온 생크림과 섞인 달콤한 과일의 맛은 기분 좋을 정도로 달았다.
아주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간 인베스를 처치하기 위해, 그러다 오버로드의 존재를 알게 되어 헬헤임을 헤매게 되고, 하얀 아머드 라이더와 서로 이해를 하게 되고, 다시 잃고, 밋치의 절망을 알게 되고, 그리고 마이를 잃게 되면서 점점 집을 돌아볼 여유가 없게 되었으니까. 아파트의 복도는 썰렁할 정도로 조용하다. 군데군데 구겨지고 찢어져 발치를 뒹구는 전단지들을 바라보던 코우타는 한 뼘 정도 열린 문 앞에 섰다. 뒤늦게 떠올린 누나를 찾아 집에 들어왔다가, 텅 빈 집안을 보고 당황해서는 뛰쳐나온 그대로의 상태로 문은 열려있다. 열린 틈을 붙잡아 열다가, 발에 밟히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피해 있을게, 코우타. 하고 동글동글한 곡선으로 적힌 누나의 글씨체를 보았다. 남기고 갔었구나. 끝맛이 좋지 않았다. 메모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불 꺼진 거실, 그리고 적막, 누나가 기르는 작은 화분들이 두어 개 놓인 선반과 며칠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그 위에 내려앉은 먼지들, 다시 적막. 카즈라바 아키라 단 한명이 없을 뿐인데도 집안이 이렇게도 조용하고 이렇게나 낯설었다. 사실은 그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공간의 빛이며 온기는 카즈라바 아키라 그 자체였지 않았나. 늘 감싸고 있던 빛과 온기가 없는데 익숙할 리가. 어두운 집안의 풍경을 둘러보던 코우타는 무심코 그대로 집안 복도에 발을 올려 놓으려다가 멈칫했다.
“…….”
들어 올렸던 발을 다시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자와메 시는 거진 다 이미 헬헤임에 침식되어 모든 건물들이 제 기능을 잃었다. 마치 재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아니 사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들이 두고 간 공포가 자리 잡은 자와메 시의 거리는 이제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 들게 되어서 그 전까지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저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이 잦았다. 이를테면 보통은 거리를 걸으며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잔뜩 묻어있을 신발을 신고 그대로 집 안에 들어간다던가 하는 행동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텐데.
신발을 벗고 두 발을 집 안 복도 위에 두며 올라섰다. 늘 맨발로 지나다니던 장판이었는데도 양말의 천 건너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꽤나 까끌거렸다. 그리 넓지 않은, 남매 둘이서 살기엔 적당한 정도의 집은 지금 코우타가 선 자리로부터 두어 걸음을 걸어 앞으로 향하면 바로 부엌과 거실이 왼쪽에서 나타난다.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면 누나가 등을 보이고서 항상 앉아있는 테이블의 첫번째 하얀 의자. 그 곳으로 버릇처럼 시선을 돌려 식탁을 본 코우타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보통 식사가 차려지지 않은 테이블은 그동안 쌓일 먼지를 방지하기 위해 항상 누나가 흰 식탁보를 덮어뒀었다. 지금 코우타의 눈에 담긴 테이블 위에 흰 식탁보가 덮어져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은 그 식탁보 아래에 무언가 있다는 것이었다. 코우타는 주춤주춤 테이블에 다가가 식탁보의 끝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간단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두 종류의 나물, 누나의 특기인 고기감자조림, 그리고 코우타의 활동량을 염려해 꽉꽉 찬 밥그릇과 국이 담긴 국그릇,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수저. 아마도 대피령이 뜨기 바로 전 집에 들어오지 않는 자신을 위해 누나가 차려둔 저녁 밥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집에 들어오지 않은 만큼 집에서 누나와 마주보고 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던 때가 아득했다. 실제로 날짜를 헤아려본다면 고작해야 이삼일이겠지만 체감은 무척이나 멀었다. 이렇게 아득한 시간을 누나는 이 집에서 혼자 기다려 왔을 것이다. 몇 번이나 식사를 차리고, 치우고, 다시 차림을 반복하면서.
의자를 빼어 테이블의 앞에 앉았다. 식사 위에 반쯤 덮인 식탁보를 마저 완전히 치워내고 바라보았다. 음식들은 모두 차갑게 식어버리다 못해 나물과 밥은 수분을 잃고 말라 비틀어졌으며 된장국이 담긴 국그릇은 침전물들이 바닥에 잔뜩 가라앉아 위아래의 색이 달랐다. 심지어 고기감자조림에선 미약하게 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까지 했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전혀 식욕이 일지 않게 된 것이 대체 언제부터 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 이렇게 상한 음식을 앞에 두고서 식욕이 돈다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겠지만. 아마 그렇게 눈치채지도 못할 새에 록시드, 원래는 헬헤임에서 영글었을 그 열매의 독소가 몸에 찬찬히 쌓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천천히 손을 테이블 위로 향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젓가락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젓가락을 움직여 다른 빈 손에는 밥그릇을 들고 딱딱하게 마른 쌀알들을 간신히 한 입에 들어갈 정도의 양만큼 집었다. 젓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담긴 밥은 아니나다를까 딱딱하다. 몇 번 씹다가 밥그릇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국그릇을 젓가락으로 한번 헤집어 놓은 후 손에 들고 한모금 마셨다. 차갑다. 거기다 밍밍해. 식욕이 없는 탓인지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면 안되는데. 앞으로 언제 또 누나와 함께, 아니 누나가 만들어준 밥을 먹을 수 있을지. 이제 기약조차 할 수 없는데.
아니, 이제 그런 시간이 내게 허락될 리가 없는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언제까지 카즈라바 코우타로 남아있을 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는 코우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괴물이라던가, 로슈오라던가. 어쩌면 로슈오의 그 이름도 본명은 아니지 않을까.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도는 상념의 끝에서 마음 한 가운데에 무겁게 내려앉은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카즈라바 아키라의 하나 뿐인 남동생으로는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이미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왜 이제와 무겁게 다가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한 댓가란 누나와 영영 헤어짐을 가리킨다는 것을 나는 왜 이제서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을까.
혼자 남게 되는 것쯤이야 상관없다고 여겼다. 괜찮다고,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키라가 코우타에게 하나 뿐인 누나이듯 코우타 역시도 아키라에게는 하나 뿐인 동생이었다. 사람을 초월한 코우타가 사람들의 세계를 떠나 홀로 은둔하게 됐을 때 아키라 또한 당연하게도 혼자 남는다. 이토록 간단하게 유추해낼 수 있는 사실이 이제서야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사가라가 말한 것도 아마 이런 것일 터다.
“…….”
테이블 위로 눈물 방울이 하나 떨어져 넓게 퍼졌다. 두 개, 세 개, 여러 개 후두둑 떨어져 테이블 표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툭툭, 작게 들렸다.
그럼에도 멈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얻는 이의 소원을 들어 준다던 황금 열매를 얻어 다시 사람으로 돌려 달라 말하면 그만인 일일지도 모른다. 무한한 힘을 가진 그 열매의 힘이라면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은 인류를 구할 힘이다. 유우야와 하세, 그리고 타카토라를 위해서, 누나를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쓰여야 할 힘이다.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