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은 네가 어느 날 물었었다. 그리고 나는 순수한 의문을 담고 바라보고 있는 너의 앞에서 최대한 평온을 가장하려 무던히도 애를 쓰며 대답했다. 차마 금방이라도 오므린 꽃잎들을 활짝 벌려 이빨을 드러내 너를 집어삼킬 것 같은 그것을 똑바로 보고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다지. 꽃은 꽃일 뿐 아닌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어라... 그래?
너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는 별 말없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곰곰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꽃잎 두어 개만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굳이 좋고 싫음을 가르고자 한다면 타카토라는 꽃을 싫어한다. 나아가서는 식물 그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몇 년 전까지는 그 역시도 꽃 두 송이 정도를 꽃병에 꽂아 책상에 장식했던 일도 있었지만 헬헤임의 존재를 알게되고, 예정된 인류의 멸망을 누구보다도 앞서 알게되고, 또한 드라이버가 개발되어 갈수록 헬헤임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쿠레시마 타카토라는 꽃을 주변에서 멀리 떼어놓게 되었다. 더 이상 그에게 꽃이란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것이 아닌, 언제 어느 때에 제 숨을 틀어막아 질식시킬지 모를 독처럼 보였다. 타카토라가 조금이라도 더 제 감정을 순수히 내비칠 줄 알고 지금보다 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그 때 코우타가 안고있던 꽃다발을 잡아채 저멀리 집어던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아무도 모르게 열린 크랙에서부터 날아들어온 헬헤임의 포자가 자리를 잡고 싹을 튼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아직 헬헤임의 존재를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언제라도 저들의 목을 옥 죌 수 있는 그 식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리지만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랜 시간동안 헬헤임의 안에 몸을 담고 나오는 타카토라는 평범한 꽃들보다도 그 것들을 먼저 인식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다. 벌써 이렇게나. 벌써 이렇게나 별 다른 이유없이 싹 튼 순간부터 세포 하나하나에 순수한 악의를 품은 생명체는 쉴 틈없이 이 세계를 좀먹고있다는 것을. 유그드라실은 여전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는 있을까. 배신당한 분노보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지휘 내릴 머리를 잃은 집단이 제대로 일을 수행하고 있길 바라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꼴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거리에 드러난 헬헤임의 흔적들을 이렇게 방치해두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오! 찾았다, 타카토라!" 부질없는 상념들을 날려 보내는 목소리에 타카토라는 뒤를 돌아 보았다. 최근 어두운 얼굴을 하는 일이 잦았던 카즈라바 코우타가 무슨 일인지 오랜만에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손을 크게 한 번 흔들고는 앞으로 뛰어왔다. "찾았던건가? 무슨 일로.." "응! 나랑 어디 좀 가자!" "뭐? 잠... 카즈라바!" 한달음에 다가온 코우타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타카토라의 팔을 덥썩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어디로 가는건지 말은 해야할 것 아니냐.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끌려가며 끊임없이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코우타의 대답은 글쎄 따라와보면 알아! 이런 활기찬 소리뿐이었다. 막무가내로 끌려가길 수 여분이 지나 코우타가 멈춰선 곳은 작은 산림욕장의 입구였다. 자와메 계획도시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그 전까진 신사의 영향으로 나무들이 꽤 우거졌던 마을의 모습은 순식간에 녹빛이 대부분 사라지고 세련된 은색과 회색이 자리잡게 되었었다. 그들이 나무들을 밀어버린 이유는 혹시라도 움틀 헬헤임의 식물들을 금방이라도 빨리 눈치채기 위함이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마을의 풍경은 너무나 삭막해질 위험이 있었다. 지금 코우타가 그를 이끌고 찾아온 산림욕장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남겨둔 최소한의 양심인 곳이었던 것이다. "...여긴 갑자기 왜..." "요즘 머리 복잡할 일 많잖아. 간만에 맑은 공기 좀 쐬자는 뜻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돌아보는 코우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가끔은 그의 미소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짐을 느꼈던 타카토라였지만 지금은 그저 불안함만이 가득했다. 들어가자며 잡아끄는 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걸음을 떼어 이 앞으로 들어간다면 보게될 것들이 두려웠다. 이 곳 역시 그 것들에게 이미 집어삼켜져 있을지도 모른다. 늘 인류의 주변을 감싸 숨쉬었던 그들의 자연이 틈을 타고 나타난 탐욕스러운 청록색과 자주빛들에게 엉켜있을 그 모습들이 머릿 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까 전까지 타카토라가 보았던 마을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아있던 그 것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둘의 눈 앞에 입을 벌리고 서있는 이 숲의 입구는 지옥을 향한 문턱과 다름이 없을 것인데. 머릿 속에 그려진 풍경이 타카토라의 발목을 붙잡아 더는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무엇보다 그 지옥을 코우타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니까 타카토라." 그 심정을 너는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미동없이 선 타카토라의 등에 휙 팔을 두른 코우타는 거침없이 그를 끌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안의 모습은 타카토라가 우려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신기할 정도로 멀쩡했지만 그럼에도 거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무 기둥들이 박힌 길과 그 양 옆에 빼곡히 늘어선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들이 참을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바로 머리 위에서 인베스라 이름 붙인 괴생명체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뭉쳐있는 것같은 느낌이었다.오히려 헬헤임 안에 서있는 쪽이 머리만은 훨씬 차분해질 정도로 이 곳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저기 안으로 들어가볼래?" 입술을 굳게 닫고 말을 잃은 타카토라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코우타는 무언가 작정을 한 모양새로 다시금 그를 붙잡고 만들어둔 길을 벗어나 촘촘한 나무들 사이로 몸을 들여놓았다. 그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타카토라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겨 따라갔다. 몇 걸음을 더 걸어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자 어느새 울창한 숲 속이었다. 그제서야 코우타는 타카토라를 놓고 떨어져나와 두어 걸음 앞서 수풀 사이에 섰다. 타카토라의 눈 앞에서 등을 보이고 선 코우타의 발 아래 깔린 낙엽들이, 그 발치에 핀 꽃이, 어깨에 닿은 풀들이, 그리고 머리에 닿은 나뭇잎들이 숨이 막혔다. 그대로 넘실대는 녹빛에 네가 먹혀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서. 무거웠던 걸음을 빠르게 움직여 다가간 타카토라는 코우타의 등과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타카토라의 행동에도 코우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그의 팔 위로 손을 얹으며 살짝 기대었다. 바로 귓가에서 조금 흐트러진 숨이 느껴졌다.
며칠 전 마이의 부탁으로 자신이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을 때 바라보던 타카토라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약하게 눈썹을 찡그리고 꽃다발을 바라보는 얼굴이 꽃을 싫어하는건가 싶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꺼림칙해하고 있었다. 더 깊숙히 파고들어 생각하자면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향기로웠던 꽃을 보고,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어보였던 그 강한 남자가 무서워하고 있었다. 코우타는 금방 타카토라의 두려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그 곳에 있었다. 죽어가는 숲 속.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 안에 너무 오래 머물러 헬헤임과 바깥의 자연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졌다.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다. 일깨워주고 싶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피어있었던 그들은 아직도.
어깨를 꽉 끌어안고 있는 타카토라의 팔을 살짝 풀어내며 코우타는 뒤를 돌았다. 애매한 창백함으로 질려있는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금씩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뺨을 간질이던 무성한 나뭇잎들이 달린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잡아 타카토라의 얼굴에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이것 봐봐, 타카토라."
매끄러운 나뭇잎들을 손바닥 사이에 두고 야윈 뺨을 감쌌다. 제대로 느껴지고 있을까.
"괜찮아."
이렇게 살아숨쉬고 있는 풀들의 숨결이.
"아직은 이렇게나 아름다워, 타카토라."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코우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네 미소로 숲에 엉켜있을 것 같았던 덩쿨들이 스르륵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타카토라 저 자신 스스로를 옭아메고 있던 불안함이 잠든 뒤에 보인 것은 맑은 연두색이 바람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생명의 숨결 속, 그 안에 서있는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