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은 어렴풋이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또 어떤 이는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납득이 되버린 일이었기에 그가 금단의 과실을 손에 쥐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지를 가하진 않았다. 물론 센고쿠 료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황금색 혹은 오색으로 화려하게 변하며 찬란하게 빛나는 과실은 카즈라바 코우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모두로부터 등을 보이며 서있었기 때문에 저의 손바닥 위에 놓인 과실을 과연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지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는 과연 힘겨운 싸움 끝에 겨우 맛볼 수 있게된 성과의 달콤함에 행복에 겨워하고 있을지, 아니면 그간 희생되어간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정이 복받쳐 울고 있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 머릿 속이 그저 하얗게 변해버려 있을는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과실의 겉면에 일렁이는 어지러운 빛들이 어서 소원을 말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과실의 형태를 눈에 담고있던 코우타가 드디어 움직임을 보였다. 손바닥에서부터 벗어나 아래로 떨어진 과실은 바닥과 부딪히며 형태가 찌그러졌다. 지켜보던 이들이 저마다 무심코 작은 비명소리를 내거나, 숨을 흡 삼키거나, 말없이 인상을 썼다.
"카즈라바."
그나마 쿠몬 카이토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내재된 목소리를 내었다. 코우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찌그러진 형태로 굴러다니는 그 과실을 발을 들어 짓밟았다. 으적대는 소리와 함께 얻는 이에게 부와 영광과 끝없는 명예를 준다던 불멸의 힘을 가진 과실은 그렇게 한 남자의 발에 의해 손쉽게도 짓이겨져 죽어버렸다.
"카즈라바!"
이번에 소리친 것은 옷이 넝마조각 수준으로 너덜너덜해진 쿠레시마 타카토라였다. 코우타를 희망으로 믿고 코우타를 지원하며 그의 절대적인 아군이었던만큼 타카토라가 방금 전 코우타의 행동에 의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코우타는 그제서야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황망한 얼굴도 아닌, 안식을 얻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생각해봤는데. 타카토라."
돌아본 코우타가 맥 빠진 얼굴로 웃었다.
"지금 이대로가 나은 것 같아. 응, 지금이 나아."
"그게 무슨 바보같은 소리냐! 그건 헬헤임을 봉인할 마지막…!"
"헬헤임이 사라지면 난 이제 뭐가 되는거야?"
소리치던 타카토라의 말을 끊어내며 이어지는 코우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이했다. 아무도 코우타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다시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평범한 카즈라바 코우타로 돌아가게 되는거잖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타카토라를 가만히 바라보던 코우타는 이제 원래의 형태는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짓이겨져 색을 잃은 과실의 잔해를 남겨두고 열려있는 크랙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전히 인류는, 세계는 인베스와 헬헤임의 잠식으로부터 위협받는 나날을 끊임없이 보내게 되었다. 허공에 크랙이 열려 그 안으로부터 인베스가 튀어나와 사람들의 틈에 뛰어들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도망을 간다. 인베스의 공격을 받아 상처입은 사람들도 생겨난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머드 라이더 가이무가 나타난다. 카즈라바 코우타는 여전히 크랙에서 나타난 인베스가 사람들을 습격할 때마다 그 괴물들을 도륙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와메 시는 비명과 환호만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끝없이. 끝없이.
그리고 이 영원을 만들어낸 것은 코우타였다.
쿠당탕! 가구들이 서로 부딪혀 내는 둔탁한 소리가 복도까지 울리자 그 끝에서부터 걸어오던 타카토라는 걸음을 빨리 하며 소리의 근원지인 회의문을 벌컥 열었다. 대강 예상은 하고 있던 그림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소리의 원인은 쿠몬 카이토와 그에게 패대기라도 당한 것인지 밀려나 질서가 흐트러진 회의용 테이블에 기대있는 카즈라바 코우타였다. 타카토라는 누가 들어오건 아랑곳없이 제 할 일을 하려는, 그러니까 주먹을 꾹 쥔 채 코우타의 멱살을 붙잡고 한대 날릴 기세인 카이토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만, 그쯤 해둬라."
"…."
어깨를 꽉 붙잡은 타카토라에 의해 결국 카이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카이토가 물러서면서 제 자리에 똑바로 서는 코우타에게 흘끔 시선을 준 타카토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둘의 사이를 좀 더 떼내었다. 말없이 구겨진 자신의 옷 매무새를 다듬는 코우타는 예전에 비해선 말수나 표정이 꽤 많이 줄어들었다. 눈에 띄게 우울해졌다거나, 음울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성격이나 사상이 비뚤어져버린 것인가 하면 그 역시도 아니었다. 언듯 보기에는 그저 평소보다 좀 더 차분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헬헤임에서의 그 날 이후로도 코우타는 인베스로부터 자와메 시의 시민들을 지키는데에 열심이었다. 맨몸으로 인베스에게 얻어맞아 때로는 몸 어딘가가 골절이 되어도, 변신 중의 전투에서 무리하게 힘을 써 데미지가 축적된 몸이더라도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곳으로 뛰어가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영웅심에 도취된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코우타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불태우며 안간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고원에 매달리고 있었다. 지금 타카토라의 눈에 비치는 코우타는 그랬다.
옷 매무새를 마저 정리한 코우타는 카이토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 과실이 그렇게도 아깝다면 다음에 열릴 땐 네가 손에 넣어."
"하?"
"하지만…! 나 역시 끊임없이 방해할거란 것도 잊지마. …카이토."
조용하게 시작된 말은 갈수록 달아올라 뜨거운 열기를 품은 목소리로 끝이 났다. 이를 악 물고 씹어뱉듯이 말하는 이 얼굴과 목소리를 과거에 마주한 적이 있었음을 타카토라는 기억해냈다.
'나는 당신들의 방식을 인정 못해!'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악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당신들을 나는 절대 용서 못해…!'
악의를 모르던 청년은 타카토라가 떠올린 과거의 그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멋대로 해라. 나 역시 진심으로 상대해줄테니."
매서운 얼굴로 대답한 카이토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타카토라의 손을 쳐내며 문을 향했다. 바닥과 부딪히는 빠르고 무거운 구두굽 소리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처음부터 이도저도 아닌 짜증나는 놈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끝까지 변할 줄을 모르는 놈이군. 어차피 미칠거라면 제대로 미쳐라, 카즈라바. 그런 어중간한 태도는 집어치우고."
센서가 반응한 문이 지잉 소리를 내며 열리고, 멈췄던 구두굽 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뚜벅뚜벅하는 발소리가 멀어질 즈음 다시 기계적인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회의실에 남은 둘을 감싸며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나?"
타카토라가 물었다. 타카토라와 한번 눈을 마주친 코우타는 넓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코우타의 허리에 매달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록시드와 그의 왼손에 들려진 드라이버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코우타는 점점 손에서 드라이버를 떼놓는 일이 드물어 졌다.
"오전에 두개쯤 열렸었나. 이쯤되면 오늘은 더 열리진 않겠네, 크랙."
방금 전 카이토와의 설전 탓인지 여전히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괜찮은건가? 지쳐보이는군."
"어… 잠을 좀 못 잤어."
"……그러니까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나. 그 때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모두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갔을거다. 너도, 60억의 인류도."
타카토라는 질책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하하. 등을 돌린 코우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타카토라. 당신은 헬헤임의 존재를 알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나? 어떻게 살았을지 짐작이 가?"
"……."
타카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억나지 않는다. 몇년 전부터 쿠레시마 타카토라라는 청년의 인생은 오직 헬헤임의 잠식으로부터 인류를 조금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의 머릿속엔 헬헤임과 인베스와 인류의 구원만이 한가득이었다.
"평화로운 일상 말이지."
방금 전까지만해도 코우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가 웃고 있는지, 아니면 흐느끼고 있는 것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있잖아, 평화라는건 그것을 위협하는 적이 있을 때나 말할 수 있는거 아니야? 적이 있어야 전쟁이 성립되는 것처럼, 응? 그러니까 헬헤임이 닫히고 인베스의 위협이 영영 사라진 그 순간부터 평화라는 것도 함께 사라지는 거잖아? 그렇잖아, 타카토라. 당신과 나와 인류가 원하는 평화를 위협하는 적따윈 이제 없으니까!"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타카토라를 향해 코우타는 몸을 비틀며 휙 돌아봤다.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되는거야. 이미 인베스와 싸우면서 평화를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나의, 내가 돌아갔어야할 일상은 어디에서 다시 되찾아야 하는거냐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넓은 창가에서 지고있는 태양의 노을빛에 여지없이 노출되어 그 빛을 한 몸에 받고있는 코우타는 볼썽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의 몸을 뒤덮고있는 노을빛의 안에서 타카토라는 보았다. 코우타의 안에서 양분을 받고 피어나 숙주를 감싼 기괴한 덩쿨 줄기들을 보았다. 그랬다. 타카토라가 가장 두려웠던 세상의 악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카즈라바 코우타는 저 스스로가 만들어낸 악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