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는 목소리가 있어 이안은 눈을 떴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흐리멍텅한 시야에 아주 간만에 맑은 하늘이 들어왔다. 변덕스러운 영국의 날씨가 간만에 활짝 핀 날이다. 데이트하기 딱 좋은 날이네. -까지 생각한 이안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뿌옇던 시야가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영국이라니. 자신은 분명 스피릿 베이스에서 잠들었을 터였다.
이안?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리벙벙한 얼굴을 들자 눈 앞엔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서있다. 그의 자랑이었고 그의 절망이었으며 그의 죄책감의 증거였던. 느리게 눈을 깜박인 이안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시로.
덜 깼냐? 뭐야, 그 멍청한 얼굴은.
덜 깨긴. 아직도 꿈 속인거지, 친구. 옛날이었으면 다시 나타난 친구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엇나가버린 탄환을 원망하고 너에게 빌며 오열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 오랜만에 나와준거 아니야? 시로.
뭘, 정신없는 것 같길래 배려해준건데.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웃음을 터트린 시로는 이안이 방금 전까지 누워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벤치에 앉았다. 흔히들 봄하면 떠올리는 그런 따뜻한 햇빛이 몸을 가볍게 감싸안는 이 기온이 좋았다. 정말 꿈같은 풍경이로군. 뭐, 꿈이지만. 무릎에 받친 두 팔에 몸의 무게중심을 기대며 이안은 약간은 민망한 얼굴로 웃으며 옆에 앉은 시로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네.
그래. 나름대로.
넌 한번 주저앉으면 좀처럼 일어날 줄을 몰라서 걱정이란 말이지.
먼저 떠날 수 밖에 없던 이는 남겨진 이를 향한 염려가 녹아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남겨진 이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걱정하지마. 이제 완전히 일어섰으니까. 이제 꺾이지 않아. 헤매지도 않을거고, 망설이지도 않을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괜찮아. 시로.
웃고있던 친구의 얼굴이 조금 흐려진 것 같은건 기분 탓일까, 꿈인 탓일까. 부디 그러길 바란다, 이안. 시로의 말을 끝으로 이안은 눈을 떴다.
응? 이안 일어났네!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것은 활기찬 아미의 목소리였다. 시간이 몇 시인데 이제서야 일어나는거야. 뒤이어 들리는 것은 소우지가 핀잔을 주는 목소리였다. 괜찮잖아, 밤새 연구하다 잔 모양인데. 괜찮소? 그러다 몸이 상하시겠소, 이안 공. 연달아서 소우지에게 말하는 놋상의 목소리와 이안을 걱정하는 웃치의 목소리까지도 들린다.
"아, 아아. 괜찮아. 오늘은 좀 푹 잠들었네."
몸을 어설프게 덮어 거의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다시 주워다가 방금 전까지 누워있었던 의자에 곱게 접어 내려둔 이안은 일어선 채 기지개를 쭉 폈다. 간만에 찾아온 반가운 친구를 만난 탓인지 몸은 평소보다 한결 가볍고 개운하다.
만류하는 이안에게 다이고는 언제나처럼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오늘은 브레이브하게 괜찮은 날일테니까 문제없다고~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열심히 놀러나가자 꼬셔대는 다이고를 향해 이안은 결국 졌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다이고가 손가락으로 만들어내는 브이 사인은 이곳에 있는 전원에게 있어 일종의 부적이나 주문과도 같았다. 다 괜찮을 것이라는 그런. 저를 향해 웃고있는 다섯을 한번씩 훑어본 이안은 그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항복 표시라도 하듯이 양 손을 가볍게 들어올려보였다.
"그럼 어디로 놀러갈까."
오락실 가자! 오는 길에 소우지한테 들었는데 오락실에 가본 적이 없대. 아미는 언제나 어린아이가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것처럼 생동적이다. 그 옆에 반대로 제일 어린 녀석답지 않게 가장 차분한 소우지가 부끄러운 얼굴로 작게 말한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자, 이쯤되면 슬슬 이 녀석이 나설 때다. 이안이 아직 자신의 옆에 서있는 다이고를 힐끔 바라보자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다이고는 바로 튀어나가 소우지의 옆에 붙으며 외친다. 그럼 오락실이다~! 아, 그러고보니 웃치도 오락실 가본 적 없지 않아? 오락실이라면 그, 전자 오락…이라는걸 할 수 있는 곳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헤에에. 그럼 오늘은 오락실을 가본 적 없는 소우지와 웃치를 위한 날로 해야겠네! 이안은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다섯 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옛날의 자신이었다면 낯간지러워 머릿 속에서라도 절대 떠올리지 않았을 생각을 했다. 한번 좌절해 꺾여진 채 성장하려 하지 않았던 자신을 붙잡아 일어서게 해준 동료들. 비록 시로는 그렇게 억울하게 먼저 떠나보냈지만 이번에야말로 너희들만은 이 탄환으로 지키겠다고. 이 행복한 나날들을 지키겠다고. 반드시.
이안! 빨리 와! 다시 아미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안은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금방 갈게."
"──앞으로 세 마리.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리고 이안은 손에 쥐고 있었던 가브리볼버를 들어올렸다. 다시 한번 느리게 감겼다 뜨인 눈에 비치는 것은 여기저기 깨지고 부스러진 요새의 안이었다. 여기는 데보스 군의 주거지다. 무슨무슨 성이라고 했던 것 같긴 하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왼손이 이상하게 무겁다. 고개를 약간 내려 무거운 왼손을 바라보자 아까 전 죽였던 졸개의 머리가 들려있다.
"Oh, My."
질색을 하며 그 머리를 뿌리치듯 휙 집어던졌다. 덱데굴, 꽤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머리가 굴러가버렸다. 젠장, 묻었잖아. 손등의 맨피부와 옷에 찐득하게 늘러붙은 초록색의 점액질에 이안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남은 것은 졸개 둘, 그리고 우는 얼굴을 하고 있는 양철나무꾼이 하나. 끝까지 너와 난 악연이라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안은 들어올린 가브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총성이 두 번 울리고 졸개 둘이 각자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홀로 남은 양철나무꾼이 소리쳤다.
무너진 괴물을 발로 짓밟자 양철들이 찌그러들었다. 이걸로는 부족했다. 가브리볼버를 든 손을 번쩍 치켜든 이안은 그대로 몇번이고 눈앞에 쓰러져있는 고철덩어리를 내려쳤다. 그런 기계적인 움직임만 반복되었다.
인간의 감정을 힘으로 삼는다던 괴물들은 모두 이안의 앞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당해 쓰러졌다. 이안에게선 아무 것도 뽑아낼 것이 없었다. 그는 분노도 슬픔도 원망도, 그렇다고 복수를 행하면서 기쁨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꿈 속에 모두 놓아버리고 왔다.